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83-09-29: Volume 57, Issue 1462.Digitized from IA1529713-01.Previous issue: sim_leslies-weekly_1883-09-22_57_1461.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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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근대 유학생으로, 1880년대 고종의 명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는 사절단에 합류하게 된다. 유길준은 이 여정을 통해 서구 문명의 실상을 직접 마주하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 체험은 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조선 지식인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특히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보고 받은 충격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과 비교된 문명 격차에 대한 정신적 충돌이었다.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근대 유학생으로,
1880년대 고종의 명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는 사절단에 합류하게 된다.
유길준은 이 여정을 통해 서구 문명의 실상을
직접 마주하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 체험은 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조선 지식인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특히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보고 받은 충격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과
비교된 문명 격차에 대한 정신적 충돌이었다.
“미국의 국회의사당은 그 건축 양식이 굉장하고 화려하여, 보는 이의 눈을 놀라게 한다.건물의 기둥과 벽은 모두 흰 돌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마치 구름 위로 솟아오른 듯 하다.그 공사는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마침내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건물 한가운데에는 둥근 지붕(탑)이 있는데, 그 높이가 140척(약 42.5미터)에 달하며,그 위에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이 건축의 총비용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2억 4,100만 냥이나 된다.”
“미국의 국회의사당은 그 건축 양식이
굉장하고 화려하여, 보는 이의 눈을 놀라게 한다.
건물의 기둥과 벽은 모두 흰 돌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마치 구름 위로 솟아오른 듯 하다.
그 공사는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마침내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
건물 한가운데에는 둥근 지붕(탑)이 있는데,
그 높이가 140척(약 42.5미터)에 달하며,
그 위에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건축의 총비용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2억 4,100만 냥이나 된다.”
그런데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경복궁 중건(1865~1872)을 위해 국고 약 1,000만 냥을 들였다. 그마저도 자발적 재원이 아니라, 전국 백성에게 강제로 헌납을 강요하고, 양반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피를 짜내는 혹독한 수탈을 동반한 결과였다. 국가 재정은 바닥났고, 국고는 사실상 디폴트 상태에 빠졌으며, 조선은 그 이후 수년간 극심한 경제적·사회적 혼란에 빠진다
그런데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경복궁 중건(1865~1872)을 위해
국고 약 1,000만 냥을 들였다.
그마저도 자발적 재원이 아니라,
전국 백성에게 강제로 헌납을 강요하고,
양반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피를 짜내는
혹독한 수탈을 동반한 결과였다.
국가 재정은 바닥났고, 국고는 사실상
디폴트 상태에 빠졌으며,
조선은 그 이후 수년간 극심한 경제적·사회적 혼란에 빠진다
유길준이 느낀 문명 간 격차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서구는 국민의 의지를 모아 공공의 제도를 세우고, 국부를 미래를 위한 기반 시설에 투입하는 나라였던 반면, 조선은 구체제 유지와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데에 국가 역량을 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길준이 느낀 문명 간 격차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구는 국민의 의지를 모아 공공의 제도를 세우고,
국부를 미래를 위한 기반 시설에 투입하는 나라였던 반면,
조선은 구체제 유지와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데에
국가 역량을 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뉴욕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묘사하였다:“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주민 수는 약 120만 명에 달하며,동쪽으로는 대서양을 끼고 있어 유럽 상인들이 끊임없이 몰려오고,남쪽으로는 남미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무역을 한다.내륙으로는 사방에 철도가 종횡하며, 수륙 운송이 극히 편리하여화물 교역이 대단히 번창하고 있다.한 해 거래액이 무려 우리 돈으로 140억 냥에 이르니,세계적으로 보아도 이처럼 거대한 상업도시는 흔치 않다.영국 런던이 첫 손에 꼽힌다 해도, 뉴욕은 천하 제2의 도시라 할 만하다.”
그는 뉴욕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묘사하였다:
“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주민 수는 약 120만 명에 달하며,
동쪽으로는 대서양을 끼고 있어 유럽 상인들이
끊임없이 몰려오고,남쪽으로는 남미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무역을 한다.
내륙으로는 사방에 철도가 종횡하며,
수륙 운송이 극히 편리하여
화물 교역이 대단히 번창하고 있다.
한 해 거래액이 무려 우리 돈으로 140억 냥에 이르니,
세계적으로 보아도 이처럼 거대한 상업도시는 흔치 않다.
영국 런던이 첫 손에 꼽힌다 해도,
뉴욕은 천하 제2의 도시라 할 만하다.”
조선에서는 왕을 알현할 때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최고 예법이었기에, 사절단은 미국 대통령 역시 ‘미국의 왕’으로 오해하고, 그의 앞에 나아가 엄숙하게 절을 올렸다.이에 아더 대통령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은 왕정이 아닌 공화국이며,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인사 예절 역시 악수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왕을 알현할 때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최고 예법이었기에, 사절단은 미국 대통령
역시 ‘미국의 왕’으로 오해하고,
그의 앞에 나아가 엄숙하게 절을 올렸다.
이에 아더 대통령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은 왕정이 아닌 공화국이며,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인사 예절
역시 악수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원문을 찾아본결과 얼마나 충격이었으면그날 헤드라인 첫페이지의 한페이지를 통으로 장식했음을 알수있다.이것은 조선이 봉건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체계와 국제 관례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필자가 원문을 찾아본결과 얼마나 충격이었으면
그날 헤드라인 첫페이지의 한페이지를
통으로 장식했음을 알수있다.
이것은 조선이 봉건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체계와 국제 관례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83-09-29: Vol 57 Iss 1462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 Internet Archive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83-09-29: Volume 57, Issue 1462.Digitized from IA1529713-01.Previous issue: sim_leslies-weekly_1883-09-22_57_1461.Next…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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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그는 조선의 현실과 서구 사회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조선이 얼마나 문화적·과학기술적으로 뒤처져 있고, 국민이 가난하며, 국가 체계가 낙후되어 있는지를 절감한다. 이를 통해 서유견문은 단순한 여행 기록을 넘어, 조선 개화파에게 개혁과 근대화가 얼마나 긴박하고 필수적인 과제인지 절실히 일깨워주는 ‘혁신의 경종’ 역할을 했다.즉, 서유견문은 조선 사회가 당면한 위기와 그 해결책으로서의 개화를 촉구하는 시대의 산문서였던 것이다.
한그는 조선의 현실과 서구 사회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조선이 얼마나 문화적·과학기술적으로 뒤처져 있고, 국민이 가난하며, 국가 체계가 낙후되어 있는지를 절감한다.
이를 통해 서유견문은 단순한 여행 기록을 넘어,
조선 개화파에게 개혁과 근대화가 얼마나
긴박하고 필수적인 과제인지 절실히 일깨워주는
‘혁신의 경종’ 역할을 했다.
즉, 서유견문은 조선 사회가 당면한 위기와
그 해결책으로서의 개화를 촉구하는 시대의 산문서였던 것이다.
서양에서 유학한 그의 견해와 개혁 의지는 조선 보수 세력과 구체제에 의해 ‘반란 무리’로 몰려 심한 탄압을 받았다. 유길준은 정치적 이유로 연금당하는 등 자유로운 활동이 제한되었으며, 개화파 내부에서도 의견 충돌과 갈등이 심했다.한편 고종은 점차 독재 체제를 강화하며, 외세와 내부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권력 유지에 집중했다. 개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와 내부 분열로 인해 근대화는 더디게 진행되었다.결국 유길준과 개화파가 꿈꾸던 조선의 근대화는 고종의 독재와 보수 세력의 저항에 막혀 좌절을 겪었고, 이는 조선 후기 고종은 일제에게 조선을 양도하는 대신일제의 귀족신분으로 현재가치 연300억원을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서양에서 유학한 그의 견해와 개혁 의지는
조선 보수 세력과 구체제에 의해 ‘반란 무리’로
몰려 심한 탄압을 받았다.
유길준은 정치적 이유로 연금당하는 등
자유로운 활동이 제한되었으며,
개화파 내부에서도 의견 충돌과 갈등이 심했다.
한편 고종은 점차 독재 체제를 강화하며,
외세와 내부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권력 유지에 집중했다.
개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와 내부 분열로 인해
근대화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결국 유길준과 개화파가 꿈꾸던 조선의 근대화는
고종의 독재와 보수 세력의 저항에 막혀 좌절을 겪었고,
이는 조선 후기 고종은 일제에게 조선을 양도하는 대신
일제의 귀족신분으로 현재가치 연300억원을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의 아들 영친왕은 이근폐하로 불림과 동시에제국의 육군중장으로 전장을 지휘하였다.
그의 아들 영친왕은 이근폐하로 불림과 동시에
제국의 육군중장으로 전장을 지휘하였다.
출처: 이론 갤러리 [원본 보기]